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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립미술관 개관 10주년 특별전-피카소부터 천경자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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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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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0000-00-00 ~ 0000-00-00 |
시간 |
2014.10.24(금) ~2015.02.22(일) |
장소 |
전북도립미술관 |
장르 |
특별전 |
가격 |
일반 : 10,000 단체 : 8,000(20인) 초중고 : 3,000(도내) |
주최 / 주관 |
전북도립미술관 / 전북도립미술관 |
문의 |
063-290-6873 |
예매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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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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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모네, 입체파 피카소를 전북에서
개관 10주년 특별전 <열정의 시대 : 피카소부터 천경자까지>
전북도립미술관(관장 장석원)에서는 2014년 10월 24일부터 4개월간 <열정의 시대 : 피카소부터 천경자까지>展을 개최한다.
‘2014년 전북도립미술관 10주년’을 맞아 기획한 이 특별전은 2012년 세계미술거장전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전에 이어 세계거장을 만날 수 있는 두 번째 전시로 인상파의 모네, 피사로 입체파의 피카소, 브라크 등을 만날 수 있는 전시이다. 또한 베를린 분리파의 대표작가 막스 리버만을 비롯한 모더니즘 형성기의 작품들, 이와 대비되는 한국의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오지호, 진 환 등을 볼 수 있다.
전시작품은 베네수엘라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미술관 소장품 34점, 독일 브뢰한미술관, 무터푸라주갤러리 소장품 51점,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의 소장품 18점 등 세계 유수 미술관 소장품 104점으로 구성되었다.
베네수엘라의 국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피카소 등 입체파로만 세계 거장전이 가능하며 100여년의 역사, 1,000여 명의 직원이 있는 대형 미술관이다. 이번 전시에는 이 중 피카소의 <모자 쓴 여인>과 모네의 <워털루 다리>가 포함된 대표작품 34점을 대여되었다. 2012년 판화 작품이 포함된 것과는 다르게 유화와 드로잉 작품이며, 이는 전북도립미술관과 베네수엘라 국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의 우호 증진 결과이다.
인상파 이전의 서양미술의 전통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작품가운데는 140년전의 프랑스의 오라스 드 카이아스 작 <목욕하는 여인>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이외에도 로코코시대로 추정되는 작품들과 함께 130여년 이전의 작품 6점도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
전시는 19세기 아카데미의 반발로 등장한 모더니즘을 중심으로 시대별, 주제별로 구성하였다. 모더니즘 이전의 유럽 미술, 모더니즘의 출발인 인상주의, 모더니즘의 정점인 입체주의, 그리고 한국의 모더니즘이 소개된다. 소주제는 1. 인상주의 이전 유럽 전통 회화 2. 벨 에포크를 수놓은 인상파 3. 모더니즘의 정점인 피카소와 큐비즘 4. 한국미술의 모더니즘이다.
미술에 있어 모더니즘은 19세기말 이후 등장한 감각적, 추상적, 초현실적 경향의 운동을 말하는 것으로 19세기 이전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표현 방법에서 이탈한 회화 양식이다. 1960년대 미국의 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가 평평한 표면이라는 회화의 물리적인 성질을 인식하기 시작한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모네의 작품은 모더니즘 미술의 핵심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모네의 회화가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 점차적으로 몰두하게 된 아방가르드적 회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국가와 귀족의 취미가 아닌 작가의 자유와 개성의 표현은 모더니즘의 중요한 흐름이다.
인상주의는 19세기 아카데미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으로 모더니즘의 출발이다. 형태에 구애 받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의 색을 표현한 미술운동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모네, 피사로, 리버만 작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입체주의 역시 형태를 분할, 재조립하면서 19세기 이전 회화의 원근법에 의한 공간성을 해체하는 것으로, 작가의 관찰과 분석을 통해 화면을 재구성하는 형식이다. 이 전시에서는 피카소, 브라크, 레제의 작품으로 그것이 확인될 수 있다.
분리파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미술가들이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그룹으로서 기존의 보수적, 폐쇄적, 관영화된 전람회와는 다른 전시를 만들려는 예술집단이다. 막스 리버만은 1890년 베를린에서 활동하면서 유럽의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여 독일 회화의 혁신을 주장하였고 1989년 베를린 분리파를 창립하였다. 작가는 현재 19∼20세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 받고 있다. 베를린 분리파의 특징은 어떤 특정 스타일이나 예술적 방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그대로 그리거나, 인상주의, 또는 이후 표현주의까지 실험적 작업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막스 리버만은 초대 회장으로 활동을 이끌었으며, 이후 베를린 현대미술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 모더니즘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암울한 역사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오지호, 김주경 등은 자연을 소재삼아 화집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한국의 모더니즘을 경험케 하게 인상주의 이념을 피력하였다.
한국미술의 모더니즘 부분에 전시된 작품 중 전북 출신 작가는 진환과 박래현이 있다. 진환은 전북 고창 출생으로 1934년 일본미술학교 에 입학하였으며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으나 한국 전쟁 중 유탄을 맞고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그의 많지 않은 유작과 2014년 도립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신소장품이다. 박래현은 1944년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작가는 남편인 김기창과 함께 전북에 머물며 부드러운 곡선과 동양화의 여백에 서양의 입체주의를 적용한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다.
전북, 전주는 예향의 도시로 불린다. 수세기 전부터 서예와 서화가 발달했으며 판소리 등의 소리가 구전되거나 전수되어 왔다. 이번 전시는 음악의 흥(興)과 미술의 감(感)을 체득하고 있는 전북인에게 새로운 자극과 향유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대표 작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클로드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소년시절 외젠 부댕을 만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외광묘사에 대한 기초적인 화법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용킨트에게서는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을 익혔다. 1859년 아카데미 쉬스에서 피사로, 바지유, 시슬리 등과 친분을 맺게 되었고, 1874년 프랑스 파리 시내에 위치한 사진가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모네를 비롯한 작가 30명으로 첫 인상파 그룹전을 개최하였다. 당시 이상적이고 정형화된 아카데미즘의 전통을 깨고 흐릿한 윤곽과 덜 칠한 듯한 작품을 선보이자 언론과 평단은 조롱 섞인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상파'라는 말은 이때 모네의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모네는 인상파로 시작하여 평생을 ‘영원한 인상파’로 자처하였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카미유 피사로는 1830년 서인도제도의 세인트 토머스섬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인상파 화가들 가운데 최고의 자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피사로는 수많은 젊은 화가들에게 인상주의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종종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졌다. 그는 자연과 빛의 효과를 묘사하였고, 끊임없이 풍경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며 이국적인 섬과 그곳의 주민들을 스케치하며 야외에서 그림그리기를 즐겼다. 젊은 시절 그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로 도망쳤다. 덴마크 화가인 프리츠 멜비와 함께 머무르며 수채화나 드로잉 작업에 몰두하는 등 2년 여 동안 베네수엘라에 머무르다 다시 파리로 돌아가 미술공부를 시작하여 인상파 화가가 된다. 말년에 시력이 약화되어 더 이상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창밖의 풍경을 그리는 등 최후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다.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2∼1935)
막스 리버만은 19세기와 20세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 받는다. 독일의 인상주의를 이끌어냈으며 1890년부터 1920년대까지 베를린 현대미술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리버만은 1847년 유대인 사업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다가 자신의 예술적 소명을 깨닫고 바이마르 아카데미에 들어가 미술 공부를 하였다. 초기 작품은 쿠르베와 밀레의 사실적인 양식에 영감을 받았고, 1890년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 마네와 드가의 양식에 가까워졌다. 막스 리버만은 유럽의 새로운 경향들을 받아들이며 독일 회화의 혁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898년 베를린 분리파를 창립하였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막스 리버만은 프로이센 예술원 원장을 역임하고, 푸르르 메리트 훈장 수상과 베를린 명예시민에 추천되는 등 독일 화단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933년 유대인 출신이며 나치에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사임을 강요받고, 퇴폐미술전 화가로 낙인되어 작품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 후 1935년 생을 마감하였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에서 출생하였다.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렸다. 파리에서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 암울했던 파리의 이면을 그린 청색시대와 밝은 색조로 곡예사와 서커스 단원을 그렸던 장밋빛시대를 거쳐 1905년 그는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그림의 형태가 점점 단순화되어 가기 시작했고, 1907년 그의 대표작인《아비뇽의 처녀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면서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모더니즘의 절정인 입체파를 창안하게 되었다. 피카소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91년간의 생애 중 80여 년을 미술에 바치며 20세기 현대미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
조르주 브라크는 1882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서 출생하였다. 피카소와 함께 세잔의 영향을 받아 색채와 구성을 통해 입체주의의 출발점을 형성하면서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브라크는 정물화를 통하여 입체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하였고 보다 세련된 경지의 입체주의를 완성하였다. 그는 만년에 이를수록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를 사용하여 이성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중시하는 프랑스적 전통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였다. 브라크는 회화뿐만 아니라 무대장치 디자인, 조각이나 스테인드글라스, 보석공예,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는 1948년 제24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1등상을 수상하였고, 1961년에는 살아 있는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되었다.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
페르낭 레제는 1881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였다. 레제는 입체주의에서 비롯되었지만 대상을 원통형, 즉 튜브로 탈바꿈시킨 '튜비즘(tubism)'을 창안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여 대포와 비행기 등을 스케치하면서 기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기계적인 표현 방식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곡예>나 <자전거 타기>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작가는 대중적인 미술을 지향했지만, 자신의 그림이 어떤 것으로 특징화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즉 오로지 조형적인 가치만을 지닌 회화를 구사하고자 한 것이다. 작가는 말년 10년간, 책의 삽화, 벽화, 스테인드글라스, 직물 공예, 모자이크, 조각, 무대 및 의상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작업하였다.
후안 그리스(Juan Gris, 1887∼1927)
후안 그리스는 188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하였다. 상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회적 위치가 높은 중산층의 환경에서 자랐다. 1906년 파리로 이주한 그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활동하던 입체파에 합류하여 입체주의의 원리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연스러운 색채, 형태 또는 원근법 같은 다른 요소들을 사용해 이런 요소들을 통합하거나 종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특히 대상 자체는 본래의 자연스러운 형태가 아니라 왜곡되었지만, 명암의 어두운 부분을 이용하여 공간이나 배경을 암시함으로써 대상을 구체화하였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
- 디에고 리베라는 1886년 멕시코 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다. 열 살에 산카를로스 미술학교에 들어가 약 6년간 교육을 받았으며, 당시 멕시코의 민중화가를 만나 멕시코 민중예술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07년부터 1916년 중반까지 유럽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미술을 접하였다. 그 중 1911년 파리에 머무르며, 피카소, 브라크, 클레 등과 교유하면서 입체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리베라는 가장 근대적인 미술 운동인 입체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를 연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아내인 프리다 칼로와 함께 멕시코의 가장 중요한 미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이중섭 (1916∼1956)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하였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미국 예일대에서 미술공부를 한 임용련에게 지도받으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일본을 유학하고 졸업 후 서울로 돌아와 1941년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고, 유학 중에 만난 마사코와 혼인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가족과 함께 부산, 제주도 등지에서 피난살이를 하며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생활고로 인해 회화의 재료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UN군부대에서 노동을 하며 양담배갑 속의 은지를 모아 은지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은지를 반듯하게 편 다음 철필로 종이가 뚫어지지 않을 만큼 눌러 윤곽선을 그린 후, 검정이나 흑갈색의 물감, 혹은 먹물을 솜, 헝겊으로 문질러 선묘를 도드라지게 하는 방법으로 제작했다. 은지들은 처음부터 뜯겨지고 구겨진 상태로 구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구겨진 자국들이 만들어내는 선을 작품 속으로 흡수하여 더욱 자연스럽고 독특한 화면을 만들어내었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도 소장할 만큼 독창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박수근 (1914∼1965)
국민화가로 불리고 있는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하였다. 한국 작가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평범한 서민을 주제로 삼아 독자적 조형논리와 단순화된 구상양식에 토속적 질감과 미의식을 혼합하여 한국적 아름다움과 서정미를 표현한 작가이다. 특히 바탕의 처리방식이 독특하여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의 표면처럼 우툴두툴한 효과가 보이며, 형상이 바탕 질감에 깊이 스며들어 일체감을 이룬 자연성을 느끼게 한다. 원색에 의한 화려함을 거부하고 질박한 색채와 표면질감으로 견고함을 이루어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이루었다.
오지호 (1905∼1982)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하였다. 그림에 입문한 것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 뒤인 1922년경에 우리나라 최초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유화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l926년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시작했는데 당시는 암갈색과 회색조의 그림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귀국 후 서양화 단체인 녹향회에 가입하면서 사실적 시각에 입각한 밝은 색조와 향토성을 절묘하게 배합한 인상주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진 환(1913∼1951, 전북출신)
진환은 1913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기용이었으나 미술 활동을 시작하면서 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새로운 표현 형식이었던 유화 기법에 매료되어 1932년경부터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고,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미술학교 서화과에 입학하였다. 그 후 1941년 김종찬, 이중섭, 이쾌대, 문학수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조선신미술가협회’ 회원들은 1944년까지 활동하면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는 것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고, 특히 소를 즐겨 그렸다. 1943년 귀국 후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8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박래현(1920∼1976, 전북출신)
박래현은 1920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1944년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초기작들은 대체로 일본화풍의 채색화가 지배적이었으나 해방 이후부터 남편 김기창과 함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 후 부드러운 곡선과 동양화의 여백에 서양의 입체주의를 적용한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하였고,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여성 특유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채색과 면 분할에 의한 화면을 선보이면서 한국화의 새 장을 개척했던 신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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