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마을이야기 특별전Ⅱ
완산칠봉과 완산동 사람들
전주역사박물관에서는 ‘완산칠봉과 완산동 사람’이라는 주제로 완산동의 이야기와 유물들을 모아 7월 24일(목)에서 9월 28일(일)까지 특별전을 개최한다. 마을이야기 특별전은 마을역사의 복원이자 문화콘텐츠를 확보하는 길이다.
완산칠봉은 전주의 옛 지명 완산의 유래가 된 영기 어린 산이다. 완산자락에 여러 종교와 신앙 시설이 들어선 것은 완산의 정기와 무관치 않다. 어르신들에 의하면 완산칠봉은 시신을 거꾸로 묻어도 탈이 없다고 할 정도의 명당으로 알려져 몰래 묘를 쓴 평장들이 많았다고 한다.
완산자락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이며, 호남최초의 교회 은송리 교회가 자리한 개신교 전파의 산실이다. 또한 가장 오래된 지역원로들의 경로당으로 도지사와 시장이 부임하면 으레 인사를 올렸던 기령당과 전주에서 두 번째로 개교한 완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완산동은 전북도청과 전주시청에 가깝고, 남부시장을 끼고 있어서 상인과 공무원들이 많이 살았다. 하숙생들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에 완산자락은 일본인들이 살지 못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인들이 살면 병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완산동에는 얼음을 떼서 저장하는 빙고가 있었다. 다가산자락에서 용머리쪽으로 뻗은 마을을 빙고리라고 하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다가산 자락에 지금도 몇 개의 석굴이 남아 있는데, 이굴들도 빙고로 쓰였을 개연성이 있다. 바로 그 옆이 전주천 물이 홱 돌아가는 곳으로 소가 깊어서 얼음이 두껍게 언다.
총 80여점의 유물이 ①지명유래 ②완산칠봉과 용머리고개 ③완산동사람들 ④종교와 교육 ⑤군자정과 기령당 등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헬리켐으로 하늘에서 촬영한 영상을 통해 완산동을 입체감 있게 한눈에 볼 수 있는 코너도 마련하였다.
전시유물 중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완산비 탁본>이다. 고종은 전주를 황실의 고향으로 성역화 하면서 1900년에 오목대, 이목대, 완산에 비를 세웠다. 이중 완산비만 행방이 묘연하데, 이 비의 탁본이 전시된다. 완산비가 사라진 것은 글씨를 쓴 자가 을사오적 이완용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놋쇠로 만든 상>도 주목된다. 완산교회 뒷길이 지금과 달리 주도로였고 거기에 놋그릇을 만드는 유기전이 있었다. 이 유기전에서 만든 놋쇠상으로 놋그릇을 만들어 팔던 할머니로부터 어렵게 대여해 선보이는 것으로 형태는 일반상과 유사하지만 놋쇠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상이다.
이외에 의재 허백련이 완산을 여행하면서 완산칠봉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수묵화 2점, 창암의 ‘관수세심(觀水洗心)’편액, 은송리에서 발간한 창암서첩 ‘화동서법’원본, 하도 많이 사용해 손잡이가 거의 닳은 말(斗) 등 예술작품에서 생활용품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된다.
마을이야기 특별전은 숨겨진 마을 이야기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전시이다. 완산동의 뿌리를 찾아 역사 ? 문화적 정체성을 정립하며, 더불어 완산동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통해 전 세대가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완산칠봉의 정기가 서린 완산동
완산동은 완산칠봉 자락에 형성된 마을로 전주천을 경계로 전주도심과 연결되어 있다. 완산교, 서천교, 매곡교를 통해 전주부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마을 앞 천변은 서문밖장과 남문밖장이 열리는 곳이다.
전주의 옛 지명은 완산으로 완산칠봉에서 유래하였다. 완산칠봉은 전주의 정신적 뿌리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 고종황제는 전주를 황실의 고향으로 성역화 하면서 오목대ㆍ이목대와 함께 완산에 비를 세웠다.
완산은 신령스런 정기가 서린 산으로 알려져 있다. 용머리고개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혈맥이다. 완산자락에 여러 종교와 신앙이 자리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일제강점기 때 완산동은 일본인들이 살지 못한 곳으로 유명하다.
완산자락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이며, 호남최초의 교회 은송리교회가 있던 곳이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원로들의 경로당 기령당과, 전주에서 두 번째로 개교한 완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가 있던 곳이다.
완산칠봉의 지명유래와 행정구역 변천
현 완산동은 조선시대 부남면(府南面)의 은송리(隱松里)ㆍ곤지리(坤止里)와 부서면(府西面)의 빙고리(氷庫里)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 일원을 병합하여, 완산칠봉에서 이름을 따 완산정(完山町)이라 하고 전주면(全州面)에 편입하였다. 전주면은 1935년 전주와 완주가 분리되면서 전주부(시)로 승격되었다.
광복후 1946년 완산정을 완산동으로 고치고 동완산동, 서완산동, 중완산동 3개동으로 나누었다가, 1957년 동완산동과 서완산동으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주 옛지명 완산의 유래 완산칠봉
“ 완산(完山)이란 산은 나지막한 한 봉우리에 불과할 뿐인데,
한 고을이 이로써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 이규보, 「남행월일기」
완산칠봉은 전주의 옛 지명 완산의 유래가 되는 산이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완산이 작은 산에 불과한데 고을 이름을 삼은 것이 묘하다고 하였다.
완산은 풍수상 전주의 안산에 해당되고, 남복산(南福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기러기 형국의 산형이다. 외칠봉, 내칠봉, 좌우칠봉으로 구분되어 삼면칠봉이라고 한다. 완산은 조선왕실의 뿌리로 인식되어 땔나무를 채취하는 것을 금했다.
완산은 영기가 어린 산으로 시신을 거꾸로 묻어도 해가 없을 정도로 명당이라 한다. 그래서 평장(平葬)의 형태로 몰래 묘를 쓴 경우가 많았다. 완산에 소나무가 많았으나, 벌목으로 민둥산이 되어 일제강점기 때 삼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용머리 고개
용머리고개는 산세가 용의 머리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전주고지도에 용두치[龍頭峙]라고 표기되어 있다. 전주의 비상을 의미하는 형세인데, 일본이 들어와 용머리를 절단하고 길을 내었다. 당시 지역토호들이 강하게 반발했다고 하며, 지금도 일제에 의헤 끊어진 전주의 혈맥을 이어야 한다는 목청이 높다.
【용머리고개 대장간과 골동품점】
용머리고개에 대장간과 골동품점들이 모여 있어 볼거리가 되고 있다. 구술에 의하면 강대경씨의 부친이 일제강점기 때 용머리고개에서 대장간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현재 가장 오래된 대장간은 1956년에 문을 연 광명대장간이다. 김제ㆍ부안 들녘으로 나가는 길목이므로 일찍부터 대장간이 있었던 것 같다. 현재 용머리고개 골동품가게 중에 가장 오래된 곳은 광명당이다. 태평동에 있다가 1982년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이후 여러 골동품점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다양한 계층이 함께 했던 완산동 사람들
완산동에는 상인들과 공무원들이 많이 살았다. 이는 전주천 건너 남문시장이 있고, 전북도청과 시청이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도심에 인접해 있어서 하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산자락 위쪽으로 풍광을 즐기는 문화와 인사들도 자리했다. 백운정, 청학루, 백학루, 기령당 등이 그런 것들이다. 또 반공호 길 건너쪽에는 도 국장사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청에 가깝고 산세가 좋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주도심과 완산동을 잇는 전주천 다리
? 매곡교 梅谷橋
남문시장과 연결된 다리이다. 맷골로 가는 다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그 아래로 우시장이 열려 쇠전다리라고도 하고, 다리 주변에 담뱃대 장수들이 즐비해 연죽교(煙竹橋) 또는 설대전다리라고도 하였다.
? 서천교 西川橋
매곡교와 완산교 사이, 완산교회 앞쪽의 다리이다. 이 천을 서천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화로웠던 다리로 1847년(헌종 13)에 세운 서천교개건비가 있다. 홍수로 유실되어 1932년 박기순이 나무다리를 가설하여 박참판다리라고도 한다.
? 완산교 完山橋
용머리 고개로 나가는 다리이다. 소금전이 있어서 소금전다리, 염전교(鹽廛橋)라고 불렀다.
유기전
완산동에는 놋그릇을 만들어 파는 유기전이 몇 군데 있었다. 완산교회 뒷길과 대명까치맨션 근처 자리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전주부성안 시전(市廛)에 ‘주석방거리’라고 하여 놋그릇을 파는 점포들이 객사 뒤에서 한성호텔로 가는 골목에 모여 있었다.
완산교회 뒷길에서 유기전을 했던 면담자에 따르면 195~60년대에 유기전을 시작했으며 이곳 말고도 유기전이 2~3군데 더 있었다고 한다. 직접 만들어 팔았고, 후엔 징과 꽹과리 등 도 팔았는데, 이는 서울에서 가져다 판 것이라 한다. 스테인레스가 들어온 이후로 유기전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호남 최초의 교회 은송리 교회
은송리 교회는 호남최초의 예배당으로 현 서문교회의 전신이다. 1893년 정해원이 52냥을 주고 은송리의 행랑채가 딸린 초가 한 채를 사서 예배를 보았다. 은송리는 전주천변에서 지금의 완산교회 주변을 말한다. 교회의 정확한 자리는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전주부사에는 백운정 부근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백운정은 현감 백치언이 건립한 것으로, 후에 박기순이 백운정 옆에 청학루를 세웠다.
?완산교회
완산교회는 전주에서 서문교회, 남문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설립된 교회이다. 서문교회에서 남문교회는 1905년, 완산교회는 1926년 분리되었다. 1929년 완산교회로 명칭하였고, 1933년에 현위치로 이전하였다.
? 화산교회
1949년 기전학교 강당에서 기도회를 가진 것을 시초로 1951년 전주화산교회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예수병원 건너편에 있다가 이전하였다.
완산의 정기를 품은 사찰
?칠성사
완산동에서 가장 오래된 완산자락의 사찰로 1900년 진석환거사가 창건하였다.
?관음선원
1950년대 보현 스님이 묵담스님을 모시고 창건하였다. 풍광이 좋고 용두봉 쪽이 명당이라 하여 현 위치에 창건 한 것이라고 한다.
?원각사
1951년 완주 위봉산에서 옮겨온 사찰로 당시 전몰장병 유골 봉안소였다고 한다.
김유신을 모신 사당 완산사完山祠
전주지역의 김유신 장군 후손들이 1933년 건립한 사당으로 완산시외버스정류장 뒷편에 있다. 김유신장군이 황산벌 전투 후 주류성으로 가는 길에 전주에서 머물렀다고 하여 건립한 것이다.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가 세 집안이 함께 제를 지낸다.
천변가에 즐기한 점집
지금은 줄어들었지만 천변을 끼고 점집들이 즐비하였다. 남문시장이 발전하면서 근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많게는 100집이 넘게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격전지 완산
4월 27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뒤따라온 홍계훈의 경군(京軍)은 그 다음날 완산에 진을 쳤다. 동학농민군과 관군간에 12일간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다음은 『전주부사』(1943)에 전하는 완산전투 기사이다.
“5월 1일 동학군이 갑자기 남문에서 출격, 싸전다리를 넘어 남북 두 대로 나뉘어 완산 주봉에 있는 관군을 향해 돌진했다. 곧 남쪽의 한부대는 순창 가도로 나아가 오른쪽으로 꺾어져 남고천을 건너 곤지산 서쪽 기슭의 야곡冶谷으로 북진하였다. 또한 북쪽의 한 부대는 전주천 왼쪽기슭을 북진하여 투구봉으로 기어올라 남쪽에서 아군과 합세 매곡梅谷을 사이에 두고 검두봉의 낮은 언덕에 포진해 있던 관군의 일대를 습격해 일거에 완산을 점령하였다. 매곡을 경계로 투구봉과 검두봉 사이에서 일대 접전이 펼쳐졌다.”
? 동학농민군 전주입성기념비
1991년 완산칠봉 전적지에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가 건립되었다. 전주성 점령과 관련해 유일한 기념물이다.
전주에서 두 번째로 개교한 완산초등학교
완산초등학교는 전주초등학교에 이어 전주에서 두 번째로 개교하였다. 1906년 사립함육보통학교로 시작하여, 1913년 제2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처음에는 전주교대부속학교 자리에 있다가 1939년 완산동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완산동에 거주했던 옛 원로들은 대부분 완산초등학교 졸업생이었다. 현재는 학생 수가 줄어 전교생이 100여명이고, 곤지중과 함께 있어 정문과 운동장을 같이 쓰고 있다. 완산서초등학교는 1992년에 개교하였다.
? 전주시립도서관
1949년 전라북도 도립 도서관으로 개관하여, 1963년 시립도서관으로 개칭하였다. 1989년 완산동 수돗골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완산공원 꽃동산과 함께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조선말에 창건된 지역유지들의 경로당 기령당耆寧堂
기령당은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유지들의 양로당으로 군자정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군자정은 부성밖에 건립된 최초의 활터로 빙고리에 있었으나 불이 난후 완산칠봉 서쪽 끝 자락 현 기령당 자리로 이건되었다.
1938년에 건립된 ‘기령당사적비’에 의하면 1899년 부중의 인사들이 모여 부사청건물에 양로당을 처음 창설하였고, 1921년 진사 이건호가 완산동에 있는 가옥과 대지를 기증하여 완산동으로 옮기고 기령당이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1949년 인창섭이 옛 군자정 건물과 터를 기증하여 이건하였다.
도지사, 시장 등 기관장들이 부임하면 먼저 기령당에 와서 인사를 드렸다. 이런 연유로 기령당에는 전라감사와 전북도지사의 명단을 수록한 『도선생안』, 전주부윤과 전주시장의 명단을 수록한 『부윤선생안』 등이 소장되어 있다.
완산동에는 기령당 외에 학서당 등 유서 깊은 경로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완산동의 숨겨진 이야기
?빙고리 - 조선시대 전주천의 얼음을 보관해 놓은 굴이 있던 곳으로, 이 동네 이름을 빙고리라고 하였다. 현재 ‘엄마랑 아가랑 어린이집’뒤 다가산 자락에 몇 개의 굴이 있다. 『전주야사』(이철수)에 빙고가 더 큰 규모로 기록되어 있어 이 굴들과는 다르지만, 옛 예수병원 아래에 빙고가 있었고, 다가산 아래 소가 깊어 얼음이 두껍게 얼으므로 이 얼음을 떼다가 저장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이 굴들의 위치가 천변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빙고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강당재- 구 예수병원(엠마오사랑병원) 좌측(용머리고개쪽) 고개이다. 주변에 화산서원이 위치하고 있어서 이 고개를 강당재라고 한다. 고개마루 근처 좌편에 인민군이 학살했던 움푹파인 터가 있어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맷골 -투구봉과 검두봉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매화나무가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매곡교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수돗골 - 완산칠봉에서 흐르는 물이 삼복더위에도 얼음물처럼 차다하여 얼음골이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이 설치된 후 수돗골로 불렸다. 현재 언덕 위 전주시립도서관 부근이 정수장 자리이다.
?초록바위 - 조선시대 처형장으로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이다.
?땀띠샘 -완산칠봉에 있는 약수터로 물이 맑고 차가워서 땀띠에 걸린 사람도 이 물로 씻으면 땀띠가 없어진다고 해서 땀띠샘이라고 불렸다. 60년대 초반까지도 완산초등학교에 강당이 없어서 땀띠샘 계곡에서 졸업식을 가졌다.
?청학루ㆍ백학루- 청학루는 완산동 북쪽 기슭에 위치해 시내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의 정자로 현재 명륜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1921년 갑부 박기순이 전라감영의 비장청 건물을 뜯어다가 지은 것으로, 후에 국악원 분원으로 쓰이다가 없어졌다. 백학루는 청학루 서편에 큰 규모로 있었는데 그 주인을 마을사람들은 박부자로 기억하고 있다.
?방공호- 1968년 이후 전시상황을 대비해 군, 경찰, 도 지휘소가 들어가 지휘 할 수 있도록 완산자락에 조성한 땅굴이다. 지금은 입구가 철문으로 닫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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