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석 개인전 HOME  〉  전시
지역
기간 0000-00-00 ~ 0000-00-00
시간 2014.5.22(목)~2014.6.22(일)
장소 갤러리 누벨백
장르 개인전
가격 관람료 : 무료  
주최 / 주관 갤러리 누벨백 / 갤러리 누벨백
문의 063-222-7235
예매처
공유하기          
 

꿈의 정원 - 風流을 그리다.
생생지화, 꽃이 져서 꽃이 핀다.


복효근(시인)
꽃비

꽃이 핀 숲 어디선가 새가 운다. 운다. 누군가 떠났나보다. 새가 운다. 우는 것이 어디 새뿐이랴? 인간의 슬픔이 새에게 이입되어 화면에 새가 우는 것으로 그려진 것일 뿐, 그 슬픔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그것도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라면 그 슬픔의 총량을 우주에 비길 것인가? 내가 운다. 온 산천이 운다. 온 천지가 운다. 핏빛 통곡이다. 그러나 화가의 내면 깊은 곳의 신앙과 철학과 세계관을 통하여 여과된, 그래서 승화되어 화면에 그려진 세계에는 눈물의 비가 아닌 꽃비가 그려진다. 화면에서 들려오는 것은 가녀린 새소리다. 꽃은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의 상징으로 망자에게 바쳐지는 생전의 삶에 대한 위로이며 찬미이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서정주  「귀촉도(歸蜀途)」 일부분
시인 서정주 시세계의 한 획을 긋는 「귀촉도(歸蜀途)」라는 작품과 이 화면이 겹쳐진다. ‘꽃비’는 실제로 화가가 그의 형과 부모님을 사별하고서 겪어야 했던 슬픔을 형상화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개인적인 가족사를 넘어 인류 보편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천착하여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새는 무엇인가? 지상과 천상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질곡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영매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진달래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새가 귀촉도인가 아닌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면 가득 연속적으로 배치된 꽃, 그리고 작은 새의 형상 그것이 전부인 작품 ‘꽃비’는 망자에게 바쳐지는 경건한 진혼곡인 것이다.
이번 기획 초대전에서 선보이는 화가 엄기석의 작품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화가의 진지한 물음과 그에 대한 회화적 답변이다. 신앙에 심취했던 화가는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인 죽음의 문제를 형과 부모님에게서 현실로써 겪어내면서 회의와 방황과 모색기를 거친다. 성경에만 국한 되지 않은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에 대한 폭 넓은 독서를 통하여 더 넓고 깊은 의미의 질서와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수묵에서 또 다른 소재로 변모를 시도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토가 그의 창작 작업에 도입된 것이 그 일례가 된다. 황토판을 초벌구이 한 바탕 위에 돋을새김으로 형상을 조형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하여 완성한 일련의 작품과 함께 이번에 선보이는 대부분의 그의 작품 배면을 이루는 소재도 황토이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사용하던 먹과 목탄 등 다양한 자연소재가 그의 작업에 도입되고 있다. 단순히 색감만을 염두에 두었다거나 그 앞에 배치된 형상의 배경으로서만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회화적 모색의 결과일 수 있다.

풍류(風流, 혹은 ‘風’ + ‘流’)

그가 삶과 죽음에 대해 던지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이 풍류이다. 풍류는 ‘風流’이다.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속된 일을 떠나 풍치가 있고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일’이다, 여기에 비추어 엄기석의 작품세계를 해석하자면 이렇다. 수묵에서 채색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이 작품들은 주로 덩굴식물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저 위를 향하여 빛의 촉수를 뻗어나가는 주광성의 식물들이다. 작게 그려진 나비와 함께 상승이미지가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이 그림이 풍류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풍진과 질곡의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속의 갈망인 것이다.
그러나 상승의 이미지만으로 이 작품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줄기차게 위로 뻗어가는 식물들을 자세히 보면 시들어 쳐져가는 마른 줄기도 보인다. 삶과 죽음이 한 화면에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며 이것 없이는 저것도 있을 수 없는 순환의 고리로 맞물려 있어, 그 의미를 상호부양하고 있는 관계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엄기석의 풍류는 또한 ‘風’ + ‘流’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변화’이다. 삶과 죽음은 고정되어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바람과 물의 흐름에 어떤 고정된 형체가 있던가? 불교적 의미에서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며 도가적 의미에서 ’풍류‘인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 자유정신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생생지화(生生之和)
온갖 꽃들이 엉클어져있다. 무질서하다. 변화무쌍한 삶에 무슨 질서가 있었던가? 생과 생이 무성하게 만발했다. 조화보다는 무질서를 동경하듯 제 각기 자유롭게 꽃들은 빛깔과 자태를 뿜어내고 있다. 자유분방하게 생명력을 뿜어내는 소나무를 보거나 만화방창 꽃들을 보라. 같은 빛깔 같은 향기의 같은 꽃은 없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꽃들이 꽃덤불을 이루었다. 생이 생에 기대어 상생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생이 아니겠는가? 대부분 꽃과 나무를 비롯한 자연이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을과 집은 비교적 작게 표현되어있음을 본다. 자연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겸양의 자세이며 자연 없이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이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모든 생에 대한 비유이다. 일견 무질서한 듯한 생명들에 조화의 질서와 섭리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생지화(生生之和)다.
하지만 엄기석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생생지화의 의미는 여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림 속에서 나비들이 생기발랄하게 꽃 사이를 배회한다. 무한한 생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크릴 채색의 형상 뒤에 수묵의 어두운 음영으로 마치 꽃의 실루엣이라도 되는 듯이 배치되어 있는 시든 꽃들이 가벼운 흥분을 다독이고 있다. 생성과 짝을 이루고 있는 소멸을 그려내고 싶은 것이다. 삶과 죽음과의 조화, 생성과 소멸과의 조화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화이며 질서이고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의 작품은 이처럼 생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또한 동시에 기꺼운 소멸에의 충동으로 이끈다.
화가 엄기석의 작품에는 그래서 철학적 사유와 시적인 울림이 있다. 그런가하면 강렬하게 솟구치다가 잦아들어 아득한 시간 속으로 소멸해가는 생명의 박동소리가 음악으로 배어있다. 회화가 손끝에서 나오는 잔재주가 아니라 머리와 가슴, 아니 온 생으로 빚어내는 예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철학성과 문학성, 음악성이 선과 면과 색채의 예술이라는 회화의 경계를 꾸준히 확대해 나아가고 있음을 주목한다.


 

 
 
 
 
 
 
고창한場 단풍마켓 셀러 모집 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