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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들
ⓒ 윤한샘
"어떤 맥주가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매장을 처음 방문하는 고객 가운데 맥주를 추천해 달라는 이들이 종종 있다. 메뉴에 맥주 이름과 스타일 그리고 설명이 있음에도 주인장 추천 맥주가 더 미더운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대답은 똑같다.
"맥주는 취향입니다. 천천히 메뉴를 읽어보신 후 골라보세요. 만약 시음을 원하시면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고객들은 맥주를 고르고 주문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 추가 요구 없이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고 결과를 받아들인다.
<시대예보: 호명사회> 저자 송길영은 우리 사회 특징으로 '시뮬레이션 과잉'을 꼽았다.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불안감을 잠재우려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취업을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제시하는 스펙을 쌓거나 대입 모의 지원을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한다.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심지어 여행 코스를 계획하는데도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정보를 토대로 시뮬레이션을 한다. 식당 방문이나 배달 음식 주문에도 인터넷 추천 수가 기준이 되고 있다. 모두 불확실성을 피하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결과를 얻으려는 행태다.
맥주 시장에도 예외가 없다. 다양한 수입 맥주와 크래프트 맥주가 등장한 요즘, 맥주 선택에 누군가의 추천을 받으려는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예전 호프집 맥주는 단순했다. 한두 종류의 대기업 라거를 고르는데 굳이 고민이 필요 없었다. 호프집에서 취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전에 없던 맥주 추천이 많아졌다는 것은 맥주 한 잔에도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도전은 취향의 세계로 떠나는 첫 관문이다. 도전과 실패가 쌓여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결과를 오롯이 들여다보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취향이라는 궁극의 답을 얻는다.
취향을 아는 것은 나를 아는 것
시뮬레이션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동안 취향을 밝히는 데 소극적이었다. '나'는 사라지고 다수의 의견에 묻어가는 안전한 선택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다. 가장 비근한 예가 이번 탄핵 집회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표현하려 광장에 나왔다. 기성세대와 달리 자신의 방식과 취향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지연과 학연이 중심이던 커뮤니티도 이제 취미와 취향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다. 실례로 맥주를 좋아해서 모인 커뮤니티에서는 상대방의 직업이나 성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맥주 정보와 경험도 취향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공유된다.
그럼에도 나의 취향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중장년층에게 취향은 생소한 분야다. 40대 이상 연령층에서 골프를 취미로 착각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50이 되어서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오십춘기' 이야기도 더 이상 웃을 일이 아니다.
취향을 고심하기 시작하는 사람에게 맥주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우선 스타일이 다양하다. 다른 술에 비해 맥주는 많은 재료를 품고 있다. 재료들은 양조사의 아이디어와 양조 과정에서 수많은 스타일을 낳는다.
▲ 무궁무진한 향미와 쓴맛을 내주는 홉
ⓒ 윤한샘
예를 들어 쓴맛과 향을 부여하는 홉의 종류는 무려 200가지가 넘는다. 넣는 양과 타이밍, 조합에 따라 맥주 향미는 무궁무진해진다. 효모의 종류도 셀 수 없다. 배양효모를 넘어 야생에 존재하는 효모와 젖산균 같은 박테리아는 맥주 향미에 끝없는 복잡성을 부여한다. 게다가 각종 과일, 허브, 향신료, 꿀, 바닐라 빈 등은 특별함까지 더해준다.
스타일이 많다는 의미는 나의 취향을 세세하고 섬세하게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전통적인 라거 맥주부터 밀 맥주 바이스비어, 신맛이 도드라지는 람빅, 에스테르 향이 특징인 영국 에일, 수도원 맥주에서 파생된 트라피스트 에일, 열대과일 향이 폭발하는 미국 인디아 페일 에일(IPA), 오크통 숙성을 거친 임페리얼 스타우트까지 그 수는 100여 가지가 훌쩍 넘는다.
맥주는 다른 술에 비해 가격적인 부담도 덜하다. 첫걸음이 경쾌해야 끝까지 갈 수 있다. 취향을 향한 도전에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맥주는 한 캔에 삼천 원짜리부터 750밀리 한 병에 이삼만 원짜리까지 가격의 폭이 넓다.
그렇다고 무조건 많이 마시라는 것은 아니다. 취향도 좋지만 건강이 우선이다. 무턱대고 마시다간 건강뿐만 아니라 재미까지 사라진다. 2025년 새해, 맥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며 초보자를 위한 맥주 취향 안내서를 공개한다. 올해는 모두가 자신의 취향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5캔 만원 맥주 속 재미를 찾아라
▲ 대기업 라거들, 특별한 취향이 필요없다
ⓒ 윤한샘
대한민국은 만원에 4~5캔의 맥주를 고를 수 있는 전 세계 몇 안 되는 국가다. 어쩌면 유일한 국가일 수도 있다. 마트와 편의점은 맥주 소비자에게는 훌륭한 편익을 제공하는 채널이다. 종류는 대기업 라거 맥주에 국한되어 있지만 불평할 필요는 없다. 대량으로 생산해야지만 만원에 몇 캔이라는 편익이 가능한 법이니까.
흥미로운 것은 라거라도 모두 같은 라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도전의 숨어있는 재미가 여기에 있다. 겉으로는 모두 황금색을 띤 라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필스너, 헬레스, 라이트 라거처럼 다양한 스타일로 구분된다. 예를 들어 필스너 우르켈과 부데요비체 부드바르는 체코 필스너를 대표하는 주자다. 체코 라거는 맥아에서 나오는 풍미와 낮은 쓴맛으로 부드러운 목 넘김을 자랑한다.
체코 필스너가 있다면 독일 필스너도 있다. 크롬바허 필스너는 체코 필스너에 비해 조금 더 드라이하고 홉의 날카로움이 살아있는 독일 필스너다. 향기롭고 깔끔하다. 헬레스라는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밝은 라거도 있다. 파울라너 헬레스는 필스너와 달리 뭉근한 맥아 향과 낮은 쓴맛으로 갈증 해소에 탁월하다.
반면 칼스버그나 하이네켄 같은 북유럽 라거들은 헬레스에 비해 조금 더 드라이한 바디감을 가지고 있어 청량함을 즐길 수 있다. 코젤 다크처럼 어두운 라거, 둔켈도 있다. 섬세한 초콜릿 향은 둔켈이 가진 매력이다.
같은 나라에서 온 다른 라거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일본을 대표하는 아사히, 산토리, 기린, 삿포로 맥주는 미묘한 향과 바디감에서 차이를 보인다. 아사히가 가장 가벼운 목 넘김을 선보인다면 산토리와 기린은 뒤쪽으로 향긋한 홉 향을 남긴다.
다양한 라거에 도전했다면 이제 나의 취향을 반영할 차례다. 취향에 따라 손에 잡히는 맥주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라거 속 홉 향을 좋아하면 필스너 우르켈, 산토리, 기린, 크롬바허를, 섬세한 초콜릿 향이 좋다면 코젤 다크를, 부드러운 목 넘김을 좋아한다면 파울라너 헬레스, 부데요비체 부드바르, 칼스버그를 선호할 것이다.
벨기에 수도원 맥주 비밀 들춰내기
▲ 넓고 깊은 벨기에 맥주 스타일
ⓒ 윤한샘
라거라는 은하수에 도전했다면 이제 조금 더 넓은 우주로 항해해 보자. 벨기에는 작은 영토에 아름답고 다채로운 맥주를 품고 있는 나라다. 하지만 초보자들이 모든 벨기에 맥주를 섭렵하는 것은 무리다. 스타일의 폭과 범위가 넓을 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부담도 크다. 묘수는 있다. 이 안내서에서만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방법이다.
수도원에서 시작된 맥주 스타일로 첫 발걸음을 떼어보자. 두벨, 트리펠, 쿼드루펠은 수도원에서 파생된 대표적인 벨기에 맥주 스타일이다. 알코올 도수, 색깔, 향, 바디감 모두 다르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효모의 기원이 같다. 이 맥주들의 효모는 DNA가 동일하다. 20세기 초 트라피스트 수도원, 베스트말레가 정립하고 공유한 효모가 모태다.
자연스럽게 맥주에는 수지(resin), 후추, 페놀 같은 효모 향이 남아있다. 두벨, 트리펠, 쿼드루펠에서 공통으로 맡을 수 있는 흔적이다.
예를 들어 7% 알코올과 어두운색을 가진 베스트말레 두벨은 감초, 옅은 초콜릿 향이 트레이드 마크다. 반면 8.4% 알코올에 밝은 황금색을 두른 카르멜리엇 트리펠은 녹진한 서양 배와 향긋한 후추 향이 특징이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맥주는 흥미롭게도 미묘한 수지와 페놀 향을 공유한다. 두벨과 트리펠보다 더 강력한 10% 알코올에 짙푸른 색을 띠고 있는 라 트라페 쿼드루펠 또한 어두운 베리와 짙은 건자두 향을 자랑하지만 역시 수지와 페놀 향을 품고 있다.
서로 다른 알코올 도수, 색, 단맛, 바디감을 가지고 있지만 벨기에라는 정체성 위에 동일한 효모 향을 경험하는 것이 이 여행의 즐거움이다. 이런 벨기에 맥주들은 나의 취향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지표가 될 수 있다. 무작정 마시는 것보다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며 맥주에 접근하면 취향과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
▲ 벨기에 수도원 맥주의 모태, 베스트말레의 두벨
ⓒ 윤한샘
나를 이해하는 2025년이 될 수 있기를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독서나 다이어트부터 세계여행까지 일상적이고 거창한 계획으로 플래너를 채운다. 목표 실천과 달성 여부는 '나를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누구인지 이해해야만 나에게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 또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취향은 나를 아는 첫걸음이다. 취향을 알아간다는 것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품어주는 과정이다. 나를 직시하는 힘이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그 길에 맥주가 초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맥주 속에 숨어있는 다채로운 문화와 향미를 통해 좋고 싫음을 마주하는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여정에서 취향이 같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인생을 풍성하게 만든다. 같은 케이팝 스타를 좋아하는 팬들이 응원봉을 들고 사회의 올바름을 실천하기 위해 나오는 것처럼 취향은 연대의 시발점이다. 그리고 그 연대가 서로 다른 우리를 떠받치고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2025년에는 축배 속에서 모두가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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